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원자폭탄 투하 지점 === 원자폭탄 투하 지점에 대한 최초 논의는 1943년 5월 5일에 있었으나, 아직 원자폭탄이 완성된 단계도 아니었으므로 체계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본에 떨어뜨릴 수 있다는 대전제 정도만 합의되었으며 남태평양의 트럭섬 일본군 기지가 거론되었다. 구체적인 논의는 1945년 4월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조지 마셜]] 원수가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Jr.)]][* [[펜타곤]]을 6개월만에 짓도록 이끈 엄청난 추진력의 소유자이다.] 소장에게 원자폭탄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선정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그로브스 소장은 주요 책임자들을 모아 ''''원자폭탄 목표 선정 위원회'(Target Committee)'''를 조직하여 '어디를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원회의 멤버 중에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존 폰 노이만]] 등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목표 선정 위원회는 먼저 선정 기준을 정했다. 그것은 1) 지름 3마일(4.8km) 이상이고 주요 목표물이 있는 도시[* 순수한 민간인 거주 지역만 폭격한다면 나중에 욕 먹기 딱 좋았으므로 중요한 군사적 표적도 있는 도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뒤에 서술되어 있지만 히로시마에는 육군 2총군 사령부와 많은 병력이 있었다.] 2) 원자폭탄 폭발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 즉 기존에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원자폭탄만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하는지를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3) 1945년 8월까지 폭격을 받을 계획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 본토의 각 도시들이 [[히로시마의 경고문#s-2|폭격 예정 경고문]]을 받고 초토화되고 있을 때도 소수의 몇몇 도시들에는 폭격 예정 경고문이 날아가지 않았다고. 그런데 목표 선정 위원회는 자신들의 일이 매우 어려운 업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당시 일본에 '''"더 이상 폭격할 만한 대상 도시가 거의 없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도쿄를 비롯해서 [[오사카부|오사카]], [[나고야시|나고야]], [[고베시|고베]] 등 좀 그럴 듯한 군사 목표가 있는 일본의 주요 도시는 [[커티스 르메이]]의 [[제21폭격기사령부]] 휘하 수백 대의 [[B-29]]들이 들이닥쳐 소이탄과 고폭탄을 가리지 않는 [[일본 본토 공습|공습]]으로 이미 싹 다 불태워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커티스 르메이는 이 당시에는 원자폭탄 반대론자에 가까웠다. 왜 굳이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원자폭탄을 개발해서 일본의 도시를 때려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원자폭탄 같은 거 없어도 자신의 부하들이 통상 폭격만으로 수많은 일본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도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심심하면 핵폭격 노래를 부르게 된다.] || [[파일:external/aboutjapan.japansociety.org/tokyo_bombing1.jpg|width=100%]] || || [[도쿄 대공습]] 직후의 도쿄[* [[고폭탄]]과 [[소이탄]]을 조합한 통상 폭격만으로도 이러한 싹쓸이 폭격 효과는 충분히 거둘 수 있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원자폭탄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목표 선정 위원회는 일본의 남은 도시중에서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곳을 찾았다. 그곳이 바로 히로시마였으며, 이어서 [[코쿠라시|고쿠라]](현 [[기타큐슈시|기타큐슈]]), [[요코하마시|요코하마]], [[니가타시|니가타]], 그리고 [[교토시|교토]]까지 4곳이 추가되어 총 5곳의 우선 폭격 목표가 정해졌다.[* [[http://www.dannen.com/decision/targets.html|출처: 목표 선정 위원회 회의록]].]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목표 선정 위원회는 대상 도시를 다시 AA, A, B의 3개 등급으로 구분했다. AA 등급, 즉 최우선 목표는 교토와 히로시마, A 등급은 요코하마와 고쿠라, B 등급은 니가타였다. 즉, 히로시마는 원래부터 최우선적인 원자폭탄 폭격 목표지였다. 참고로 일본 천황의 궁전에 원폭을 투하했다면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았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목표 선정 위원회에서 '황거는 다른 어떤 목표보다 명성이 높지만 전략적인 가치는 가장 작다'고 일축했다.[* 출처: 목표 선정 위원회 회의록, "The Emperor's palace in Tokyo has a greater fame than any other target but is of least strategic value." 황거는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장소이긴 하지만, 군사적 가치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황거에 투하하면 [[스테일메이트|항복 선언을 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https://www.atomicheritage.org/key-documents/target-committee-recommendations|원자폭탄 목표선정 위원회가 최초로 권고한 투하 목표(영문)]]. 교토와 히로시마가 1순위에 올라있고 나가사키는 아직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교토 투하에 대해서 당시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War, 현재의 육군부, 국방부 장관에 해당.)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제동을 걸었다. 스팀슨이 [[필리핀]] 총독 부임 당시였던 1920년대에 여러 차례 교토를 방문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1893년에 [[신혼여행]]을 갔던 도시도 교토였다. 교토 방문을 통해 일본 문화에 감명을 받은 스팀슨은 인류의 문화 유산이자 일본 문화의 정수인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교토를 원폭 투하 명단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인 교토에 원폭을 투하하면 일본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해 전후(戰後) 처리 과정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물론 공식적 입장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였으며, 도쿄 천도 이후에도 일본인들에게 여전히 '정신적 수도'로 남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다. 따라서 교토는 일본의 일개 대도시 1이 아니라 [[일본/문화|일본의 정체성]]을 응축한 공간이기 때문에 스팀슨의 이러한 지적은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이 무렵 독일을 분할 점령하며 유럽에서 전후(戰後) 처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戰後)의 정치 영역까지 고려한 스팀슨의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었다. 물론 스팀슨 장관의 견해에 대해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동의하지 않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뒤이어 원자폭탄까지도 만들어낸 추진력 만렙의 이 젊은 장군은 일본의 전통 문화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자업자득|'정신적 수도'인 교토에 원자폭탄을 한 방 먹여야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표 선정 위원회가 초기 단계에서 교토를 AA 등급으로 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로브스 소장의 위세가 막강하다 하더라도 상대는 전쟁부 장관. 결국 스팀슨의 의견에 동의한 [[해리 S. 트루먼|트루먼]]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즉 민간인 주거 지역과 "옛/현 수도"는 투하 목표에서 배제하도록 주문하면서 교토가 제외되는 결정에 쐐기가 박혔다.[* 그러나 첫번째 투하지를 병사들과 수병들밖에 없는 곳으로 제한하겠다던 트루먼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원폭이 제일 먼저 투하된 히로시마는 공업도시였으므로 사상자 절대 다수가 민간인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폭격 목표로 정한 이상 민간인의 희생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결정은 스팀슨 장관 등 고위층의 개인적 판단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1945년 7월 교토는 제외되었고 대신 [[나가사키시|나가사키]]가 새로운 5대 목표지에 추가되었다.[* 맨해튼 계획 전체를 통틀어 [[레슬리 그로브스|그로브스]] 소장이 자기 고집을 꺾은 정말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뒤에 서술되지만 나가사키는 목표 선정부터 시작해서 실제 폭격 작전에서도 2차 목표였음에도 불운의 연속으로 결국 원폭을 맞게 된다.] 나가사키가 대신 선정된 이유는 기준에 부합하는 큰 도시이며, 일본의 전쟁 수행 시설 중에서도 핵심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와 인근 [[사세보시]]에 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요코하마 역시 그동안 재래식 폭격을 많이 받았던 데다 수도 도쿄와 가까웠기 때문에 목표에서 제외되었고 그로브스 소장이 승인하여 트루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한 최종 목표는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의 4개 도시로 정해졌다. 히로시마시가 높은 우선순위를 받은 이유로, 해당 위원회 보고서는 군 창고가 있고, 항구가 있는 점으로 공격의 가치가 높다는 점을 들었다. 도시를 하천이 촘촘이 지나서 소이탄의 효과가 낮은 점, 집중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언덕이 많은 점도 꼽았다. 보고서에는 쓰여있지 않으나, 위의 나가사키와 마찬가지로 [[구레시|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이 있는 점도 반영되었으리라 본다. 상기의 원자폭탄 목표 선정 논의 과정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이 있다. 히로시마, 고쿠라 등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1차적 원폭 투하 목표'에 불과했으며, 당시에는 원자폭탄을 맞고도 일본이 항복할지 여부가 미지수였으므로 미국측은 원자폭탄을 추가로 만들어내는 대로 계속해서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레슬리 그로브스|그로브스]] 장군은 [[몰락 작전|향후의 원자폭탄 소요]]를 예측하여 문서로 남긴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1945년 개발 시점에서 3개,[* 트리니티 실험, 히로시마 투하, 나가사키 투하에 각각 사용되었다.] 9월에 추가로 3개, 12월까지 매 달 7개를 만들어내어 투하할 계획으로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 제국이 항복하지 않고 총옥쇄를 부르짖으며 버티는 한, 미국은 끝장을 볼 때까지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스티븐 워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황금가지, 2005, pp. 171.~17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